도쿄의 ‘사카(坂)’ 지명에 숨겨진 에도 시대의 도시 구조와 언덕이 많은 이유를 파헤칩니다.

도쿄에 처음 방문한 이들이 가장 놀라는 점 중 하나는, 이 대도시가 생각보다 '언덕이 많다'는 사실이다. 아카사카(赤坂), 기오이사카(紀尾井坂), 곤노스카사카(権之助坂) 등 이름에 ‘사카(坂)’가 붙은 지명들이 수없이 존재하며, 그 수만 해도 500개가 넘는다. 이 언덕들은 단순한 지형일 뿐 아니라 도쿄의 과거, 즉 에도 시대의 도시 구조와 무사의 삶, 그리고 계급의 흔적이 녹아든 역사적 상징이기도 하다.
에도 시대 도쿄의 지형 – 구릉과 저지의 공존
현재의 도쿄는 과거 ‘에도(江戸)’로 불리며, 일본 막부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 도시는 해안가와 강변의 낮은 지형(下町, 시타마치)과 그 주변의 구릉지대(山の手, 야마노테)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언덕은 대체로 야마노테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상류층 무사들의 저택이 몰려 있었다.
이는 단순히 경치가 좋은 곳을 택했다기보다, 군사적·정치적 이유가 더 컸다. 높은 곳은 방어에 유리했으며, 저지대에 비해 홍수 피해가 적고, 주변을 조망하기도 좋았다. 그 결과로 언덕 위에는 정치 권력자와 유력 무사들의 저택, 사찰과 성(城)이 자리 잡게 되었다.
‘坂(사카)’라는 지명의 유래는?
일본어로 ‘坂(사카)’는 '비탈길', '언덕길'을 의미하며, 도쿄 곳곳의 지명에 이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 이름은 단순한 지형 묘사에 그치지 않고, 해당 장소의 역사와 인물, 사건을 담고 있다.
- 아카사카(赤坂): ‘붉은 언덕’. 붉은 점토질 토양에서 유래.
- 기오이사카(紀尾井坂): 기슈(紀州), 오와리(尾張), 이요(伊予) 세 번가의 접경지였던 데서 유래.
- 곤노스카사카(権之助坂): 백성을 위해 언덕을 깎아 길을 만든 무사 ‘곤노스케’의 이름을 딴 길.
도시계획 속에서의 ‘사카’의 기능
에도 시대의 도시계획은 단순한 도로망 구성뿐 아니라, 계층 분리와 사회 통제의 역할도 포함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무사들이 사는 지역과 상인·장인 계층이 사는 지역을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언덕 지형을 경계선으로 삼기도 했다. 이러한 ‘높은 곳 = 권력’이라는 상징은 오늘날에도 도쿄 지형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 외에도 ‘坂’ 지명은 생활의 흔적을 담고 있다. 어떤 언덕은 시장이 형성되어 '야사카(八坂)'라 불리기도 하고, 사찰로 이어지는 길은 ‘테라사카(寺坂)’로, 나무가 많은 언덕은 ‘키노사카(木の坂)’로 불리며 자연과의 조화를 담아냈다.
지금도 살아있는 언덕길 문화
오늘날 도쿄 시민과 여행자들은 이 언덕길들을 걷거나 자전거로 오르내리며 도심 속 소소한 변화를 느낀다. 일부 사카(坂)는 벚꽃 명소로 알려져 있으며, 다른 곳은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의 배경지로 유명해졌다.
예를 들어, 아오야마의 하나조노자카(花園坂)는 봄철 벚꽃이 만개하는 모습이 인스타그램 명소로 부상했고, 이치가야사카는 군사 요충지에서 아름다운 수로 산책길로 재탄생했다.
과거의 지명에서 배우는 도시의 이야기
‘坂’ 지명은 단순한 옛날 표현이 아니라, 지금도 도쿄라는 도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언덕이라는 공간적 특성과 함께, 당시 사람들의 삶의 방식, 권력의 구조, 도시의 확장과 경계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현대의 도시도 같은 교훈을 되새길 수 있다. 지형은 단순히 땅의 형태가 아니라, 그 위에 어떤 삶과 사회가 쌓였는지를 말해주는 ‘도시의 문장’이다.
마무리: 언덕길을 걸으며 도시를 읽다
도쿄의 언덕길은 단지 길이 아니라, 시대와 계급,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이해가 집약된 문화유산이다. 다음에 도쿄를 방문한다면 평지의 번화가만이 아닌, 언덕을 따라 이어지는 조용한 골목도 함께 걸어보길 추천한다. ‘坂’ 하나에도 수백 년의 역사가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