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현장에 남아 있는 일본어 유래 표현의 의미와 배경, 그리고 언어 순화의 필요성을 짚어봅니다.
방송국 스튜디오나 촬영 현장에서는 일반인은 이해하기 힘든 전문 용어나 은어가 자주 오간다. 그중 일부는 놀랍게도 일본어에서 유래한 표현들이다. “시바이가 없어”, “데모치로 가자”, “니주를 좀 깔아야지”와 같은 말은 PD, FD, 작가, 촬영감독 등 방송 제작 인력 사이에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단어들이 왜 지금까지 남아 있고, 어떤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개선해 나갈 수 있을지 살펴본다.

일본어 은어, 방송 현장에서 실제로 이렇게 쓰인다
“시바이(しばい)”는 ‘연기’ 또는 ‘연극’을 뜻하는 일본어로, “시바이가 없다”는 말은 ‘연출이 부족하다’, ‘상황이 지루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데모치(てもち)”는 ‘손에 들다’는 의미로, 카메라를 삼각대 없이 어깨에 메고 직접 촬영하는 방식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니주(にじゅう)”는 ‘이중’이라는 의미로, 복선을 깔거나, 촬영 시 덧마루를 깔 때 사용된다.
이 외에도 촬영 대본을 가리켜 “구다리(くだり) 빼자”라고 하거나, 첫 연출을 맡은 PD를 두고 “입봉했다”고 표현하는 등 다양한 일본어 유래 용어들이 방송 현장에 남아 있다.
왜 일본어 표현이 여전히 쓰일까?
그 뿌리는 1960년대 TV 방송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방송 인력은 대부분 영화계 출신이었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식 영상기술과 작업문화가 남아 있던 영화계에서는 일본어 표현이 일상어처럼 쓰였다. 그 습관이 방송으로 이어졌고,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전해져 온 것이다.
또한 방송 특유의 속도감과 압축성도 이유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시바이 없다”는 말을 “연출이 부족하다”고 풀어쓰는 것보다 짧고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PD, 촬영감독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들이 소속감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은어로도 작용한다.
일본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이런 용어들이 일본어라는 인식조차 없이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입봉(一本)”은 일본어 ‘잇폰’에서 유래했고, “야마(山)”는 이야기의 절정이나 핵심을 의미하는 일본식 표현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어원을 모른 채 ‘전문 용어’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마치 ‘나와바리(縄張り)’가 ‘출입처’나 ‘담당 구역’을 의미하는 기자 은어로 굳어진 것과 비슷하다. 즉,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언론 교육을 받은 1세대 기자들이 만든 시스템과 표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로 바꿔 써야 할 필요성
방송 언어는 문화와 인식을 반영하는 도구다. 따라서 일본어 잔재를 그대로 사용하는 건 단순한 표현 문제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식민지적 잔재를 계승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KBS를 비롯한 일부 방송사에서는 방송 언어 순화 지침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으며, 언론진흥재단과 국립국어원도 ‘일본어 잔재 정비’를 위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어 은어, 어떻게 바꿔 쓸 수 있을까?
- 시바이 → 연기, 연출
- 데모치 → 어깨 촬영, 수동 촬영
- 니주 → 복선, 이중 설정, 덧마루
- 구다리 → 단락, 대목
- 입봉 → 연출 데뷔
- 야마 → 중심, 핵심, 절정
- 나와바리 → 담당 구역, 출입처
일상어처럼 굳어진 표현이라도, 새로운 인식과 실천을 통해 바꿔 쓸 수 있다. 이제는 우리가 방송 언어의 과거를 성찰하고, 앞으로의 언어 문화를 만들어가야 할 시점이다.
습관보다 중요한 건 ‘의식’
일본어 표현이 방송 현장에 남아 있는 건 단지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양한 세대와 직군에서 문제의식을 갖고 바꿔 나가야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 언어는 곧 정체성이며, 방송 언어는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이다.